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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마

태종 이방원 뒷 이야기 - 고려의 충신 불굴가(不屈歌) 변안열

by 동이 리뷰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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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동이예요.
혹시 변안열의 불굴가(不屈歌)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태종 이방원을 보면서 느낀게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쓰여지는 것! 입니다.

즉, 승자쪽 입장에서 기록하고
승자가 기록한 역사책이
후세에 대부분 전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이성계 장군이
조선건국에 실패하고
고려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이성계 장군은 고려 역사책에
역성을 도모했지만 실패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에 성공하면서
이성계 장군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되었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죠.

 

태조 이성계 어진


이후에 역사책에서 조선 띄우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야겠지요.

상대적으로 고려의 충신들은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이죠.

 

최영의 초상.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87호

 


최영 장군,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충가 변안열
여기에 해당됩니다.

 

포은 정몽주 초상화


포은 정몽주야 워낙
유명해서 많이 알려졌지만

오늘 제가 살펴본 인물은
고려의 충신이자 장군인
충가 변안열입니다.


태종 이방원 5회를 보시면...

현재 무장중에 이성계 장군을
대적 할 만한 인물은 변안열
밖에 없으니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변안열

 


그냥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변안열이라는
인물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변안열 邊安烈 (1334~1390)
자는 충가(忠可)이며
호는 대은(大隱) 본래 중국
심양(瀋陽) 사람이예요.




원래 원나라 출신이었지만
병란 때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고려로 들어왔고

원주 원씨와 혼인하고
공민왕으로부터
원주를 관향(貫鄕)으로 받아
원주변씨(邊氏)의 시조가 됩니다.

 

드라마 정도전의 변안열


변안열은 용맹한 무장이었습니다.
1361년(공민왕 11)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안우(安祐)와
함께 홍건적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하여 1등 공훈을 세웠습니다.

다음해 안우 등과 서울을
수복하여 예의판서가 됩니다.

 

드라마 정도전의 변안열



1374년엔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제주)의 왜구를 정벌하고
1376년엔 부령에서 왜구를
대파합니다.

1380년엔 이성계와 함께
출정하여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칩니다.

 

드라마 정도전의 변안열


우왕이 왕이 된 후에도
왜적의 침입을 여러차례나 격파하여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社)까지
임명됩니다.

참고로 판삼사사
고려시대 삼사(三司)중의
제일 높은 벼슬이었고

영삼사사(領三司社)는
고려 시대에 회계 출납의
업무를 담당하였던 삼사(三司)의
벼슬이었는데

우왕 때는 영삼사사
최고의 관직으로
삼았다고 하네요.

 

전쟁사진기념관 변안열 초상화



변안열은 1388년 이성계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했어요. 회군 이후 이성계의
군사적 정치적 힘이 급성장하자

변안열은 고려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 이성계를 견제합니다.

당시에 변안열의 사병(私兵)이
2만명에 달하였고 2만명이라는

 

어마한 숫자의 사병은 이성계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1389년(공양왕 1) 최영의 생질인
김저가 우왕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해하려다 발각되어
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는데...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하고 한양으로
귀양갔다가 1390년(공양왕 2)
유배지에서 사형당하게 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인데요.
고려가 점점 국운이 기울던
1389년(공양왕 원년) 10월에

이성계는 생일을 자축하는
연회를 마련하고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 보았을때
변안열도 그 자리에 초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로 묻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가 ‘단심가(丹心歌)’로 대답하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변안열은 ‘불굴가(不屈歌)’로 답합니다.

“내 가슴 구멍 뚫고 새끼줄로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리고 찢길망정

너희들 하는대로 내 사양치 않으리라.
내 임금 빼앗는데 나는 굽힐 수 없다.”

 

 



두 사람은 그만큼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여서 이방원이
자기편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이 시조들을 듣고 포기합니다.

이렇듯 변안열은 고려말
이성계와 쌍벽을 이뤘던
명장이었으나 역성혁명에
반대하고 절개를 지킨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가 죽은 2년 뒤 고려의 충신

고려 3은(三隱)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는 변안열을 기렸습니다.

정몽주의 제문(祭文)을 보면

“늠름하기가 추상 같음은
공의 충렬이요.
열렬하기가 백일 같음은
공의 의절이었습니다...

이 밤에 소리 내어 크게 우는데
하루라도 감히 잊을수가 있겠습니까...

 

 

 

목은 이색 초상화


이색의 제문(祭文)을 보면

강산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 충렬이
아니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야은 길재 초상화



길재의 제문(祭文)을 보면

모든 관료들이 산처럼 우러러
보았지만 하루 아침에
와열되었으니,
슬프고 애통함을 따를데가
없습니다...


절개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당했던 정몽주가 충신으로

추앙받은 것과는 반대로

 




변안열 장군은 ‘고려사’에
간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고려사
이성계에 대항했던 변안열을
일부러 깍아내린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변안열의 충성스런 마음은 후세에는

서서히 점점 잊혀져갔고

'변안열은 간신이었다'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어쩔수 없지만 서글프네요... ㅠㅠ

오늘은 역사의 한장면
뒷이야기를 알아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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